제5호(11월) | 400년 전 왜곡된 역사 지금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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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김무일, 예)해군대령 작성일19-04-09 14:38 조회1,263회 댓글0건본문
지금으로부터 400여 년 전인 1604년(선조 37년) 6월 25일 조선 조정은 임란공신 심사결과를 발표했는데 문신에게 준 호성공신과 무신에게 준 선무공신 두 종류가 있었다.
▣ 형평성 잃은 공신선발
임금(聖)을 뒤따른 (扈) 호성공신 1등에 이항복 등 2명, 2등 31명, 3등 53 명 모두 86명인데 이중에는 내시(內侍) 24명과 이마(理馬) 즉 마부 6명이 포함되는 등 주로 임금 주위에서 시중 든 사람들이 다수를 이루었다.
반면, 선무공신 1등에는 이순신, 권율, 원균, 2등에는 김시민, 이억기 등 5명, 3등에 권준, 이운룡 등 10명, 총 18명밖에 선발하지 않았으며, 이중에 군사와 양곡을 주청한 사신 4명을 제외하면 전장에서 왜군과 싸웠던 장수들 중 녹훈된 사람은 14명으로 호성공신의 1/6도 되지 않았다.
그나마 선무 1등 공신은 이미 죽은 사람 3명 뿐 이고 이원익, 곽재우 등 당시 생존했던 사람들도 1등 공신에 추천되었으나 거부된 반면, 2등으로 추천된 원균을 1등으로 올리라고 왕이 직접 명령을 내리는가 하면, 선무공신 3등에는 이순신 예하 장수 권준과 이순신(李純信)을 원균 예하 장수 기효근, 이운룡 등 각 2 명씩 균등히 배분할 것을 선조가 끝까지 고집하여 그의 의도대로 통과시킨다.
임란 초 이순신함대 24척, 원균함에 4 척의 전선이 참전한 것을 고려하면 너무나 형평성이 결여되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을 사수하겠노라고 공언했다가 야간에 몰래 피난길에 올라 백성들로부터 온갖 수모를 당했던 선조로서는 살아있는 사람에게 선무 1등 공신을 준다는 것을 용납될 수 없었으며, 백성들로부터 전쟁 영웅으로 존경을 받고 있던 이순신 한 사람에게 공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원균을 1등으로 고집하였던 것이다. 요즈음 같았으면 3도 수군을 전멸시킨 책임자로서 1등 공신은 커녕 아마도 중징계를 받는 수모를 당하지 안 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당시 공적심사를 담당했던 공신도강에서 “원균은 당초 군사가 없는 장수로서 해상의 대전에 참여하였고 뒤에는 주사(舟師)를 패전시킨 과실이 있었으니 이순신과 같은 등급으로 할 수 없어서 2등으로 녹공 했던 것인데 방금 성상의 분부를 받들었으니 올려서 1등에 넣겠습니다.” 라고 한 기록을 보면 선조의 아집과 독단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었을 것이다.
▣ 이순신 죽이기 지금도 계속
문제는 400여 년 전에 왜곡된 역사의 해악이 오늘날까지도 미치고 있다는 것이다. 지난 1988년 高某는 소설 [원균 그리고 원균]을 발간하면서 “원균의 공을 가로채고 그 아들까지도 모함하는 성웅 이순신.... 밝히고 싶지 않은 역사의 사실입니다.” 라는 광고 문안으로 그의 작품을 대대적으로 선전한 바 있으며 李某교수는 1994년 발간한 [인물 한국사]를 통해 “연합함대의 주장은 원균이었고 이순신은 일부 작전에서 원균의 지휘를 받아야만 했다.” 라고 하는 등 역사기록을 왜곡하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이들이 이렇게 목청을 높이는 근저에는 원균 1등 공신 이라는 타이틀이 항상 함께 한다는 것이다.
KBS TV도 지난 94년 10월 22일에 방영한 [역사의 라이벌 이순신과 원균]에서 원균의 경상 우수군이 단독 전투로 왜선을 10척이나 격파했다는 장면이 있었다. 이는 당시 경상 우도 초유사로서 경상 우도 전체를 직접 순회하면서 대일 항전을 독려했던 김성일의 장계에 “우수영은 수사와 우후가 스스로 본영을 불태우고서 우후는 간 곳을 알 수 가 없고 수사는 배 한 척을 타고 현재 사천 해포(海浦)에 우거하고 있는데....” 라는 정사(正史)인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내용과는 전혀 엉뚱한 것으로서 많은 시청자들을 어리둥절하게 한 바 있다.
그런데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재조명 바람이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에 대해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 공영방송 KBS 까지
KBS가 2004년 7월부터 100부작으로 방영한 대하드라마 ‘불멸의 이순신’이 김탁환의 소설 ‘불멸’ 과 김훈의 ‘칼의 노래’를 공동원작으로 한다는 보도가 있었다. 소설 불멸에는 조선 조정의 정식 문서에서 찾아 볼 수 없는 낯선 장면들이 눈에 띈다.
‘임진년 4월 13일 자정 원균이 가덕도 앞바다에서 100척이 넘는 적선을 맞아 싸워 30여척을 격침시켰다.’ --- (불멸 1권 296쪽)
‘이순신이 명량대첩을 거둔 것은 전날 밤 꿈에 원균처럼 싸우라는 계시를 받고 그대로 실행했기 때문이다.’ --- (불멸 4권 232쪽)
‘명량대첩 뒤 이순신의 부하들은 역모를 꾸미면서 이순신을 옹위하여 거병할 준비를 하고’ --- (불멸 4권 329쪽) 등등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힐 지경이다.
왕조 실록 등 정사에 나오는 사료(史料)보다는 난중잡록이나 원균 행장기 등 개인 전기를 참조한 작품 ‘불멸’을 공영방송 KBS가 원작으로 선정했다는 것에 대해 쉽게 납득이 가지 않는다.
400여 년 전의 혼탁한 세태가 나라를 구한 한 군인의 일생을 고뇌로 일관하고 끝맺게 했는데 지금까지도 그가 이룩한 위대한 업적을 폄하하는 풍토가 이어지고 있는 현 세태를 개탄해 마지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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