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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7호(09월) | 레판토 해전에 관한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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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조덕현(충남대학교) 작성일19-04-09 11:13 조회1,089회 댓글0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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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판토 해전에 관한 연구

 

조덕현(충남대학교)

 

Ⅰ. 들어가는 말

 

  레판토 해전(Battle of Lepanto)은 1571년 10월 7일 베네치아 공화국, 교황 비오 5세 치하의 교황령, 나폴리와 시칠리아·사르디니아를 포함한 스페인 왕국과 제노바 공화국, 사보이 공국, 몰타 기사단 등이 연합한 신성동맹의 기독교 연합함대가 오스만 제국함대와 벌인 해전이었다. 이 해전에서 기독교 연합함대는 갤리선으로 편성된 오스만 함대를 결정적으로 패배시켰다.
  레판토 해전은 15세기부터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지 않았던 오스만 군에게 궤멸적인 피해를 입혔다. 또한 레판토 해전은 기독교 세계에 대해 기독교의  적으로 여겼던 투르크 족의 몰락이라는 염원을 고취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 해전에서 오스만 제국은 함선의 거의 대부분과 30,000여 명의 병사 대부분을 잃었으며, 군사사가들은 레판토 해전을 기원전 31년의 악티움 해전 이래 가장 결정적인 해전으로 평가하고 있다. 본고는 알란 밀렛 교수가 제시한 ‘3C Theory’를 분석틀로 하여 레판토 해전을 고찰하고자 한다.


Ⅱ. 해전의 배경 : Cause

 

  서기 328년에 콘스탄틴 대제(Constantine the Great)가 동방정책을 추진하기 위해 수도를 로마로부터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 현재의 Istanbul)로 옮겼다. 콘스탄티노플은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협수로에 위치해 있으며, 유럽과 아시아의 접점에 위치하여 지리적·군사적인 면에서 요충지였다.
  363년에 로마제국이 동서로 분리되었으며 곧 이어  서로마 제국은 여러 국가로 분열되었다. 반면에 동로마 제국(비잔틴 제국)은 수세기 동안 강력한 국가체제를 유지하였으며, 7세기 이후에는 이슬람 세력의 침공으로부터 유럽을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점차 동로마 제국이 쇠퇴함에 따라 소아시아 지역과 동부 지중해 연안(발칸반도 지역)이 이슬람 세력의 수중에 들어갔고, 1453년에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터키 제국에 의해 함락되고 동로마 제국이 멸망하였다.
  이후 오스만 터키 제국이 지중해로 진출하려고 하자 로마 교황을 비롯한 스페인, 베니스 및 제노아 등 기독교 세력이 터키에 대항하기 위해 연합함대를 편성하였다. 결국 1571년 10월 7일 그리스의 코린트 만 입구에서 양측의 대규모 함대가 격돌한 레판토 해전이 전개되었는데, 이 해전은 노선시대의 마지막을 장식한 역사적인 대해전이었다.


Ⅲ. 해전의 경과 : Conduct

 

  기독교연맹(Holy League)의 후원 아래 교황, 스페인, 베니스, 사보이, 제노아, 몰타, 나폴리 그리고 여러 이탈리아의 귀족들이 각각 함선과 인원을 제공하였다. 스페인 왕 필립 2세(Philip II)의 이복형제인 돈 후안(Don John of Austria)이 지휘하는 기독교연맹의 세력은 갤리선 209척, 갈레아스(galleass) 6척, 수송선 30척으로 구성되었으며, 보병 28,000명, 선원 12,920명, 노수 43,500명 그리고 대포 1,815문이 동원되었다.
  이에 대항하는 터키함대의 갤리선 229척, 소형 함선 60척이 알리 파샤(Ali Pasha)의 지휘 아래 집결하였다. 터키함대의 병력은 병사 34,000명, 선원 13,000명 및 노수 41,000명으로 기독교측보다 약간 우세하였으며 대포는 758문에 불과하였다.
  기독교함대는 터키함대와 결전하기 위하여 적을 탐색하면서 그리스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였다. 터키함대 역시 기독교함대와 일전을 치르기 위해 코린트 만의 안전한 기지를 떠나 서진하였다. 터키함대는 수적으로 우세할 뿐만 아니라 22년 전에 프레베사 해전(Battle of Prevesa, 1538)에서 기독교함대를 격퇴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승산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그리하여 두 함대가 조우한 곳이 코린트만 입구의 레판토 근해였다.
  돈 후안은 함대의 주력을 횡렬진으로 전개하고 깃발의 색에 따라 지정된 3개 전대를 편성하였다. 중앙에는 61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된 청색전대가 배치되었으며, 여기에는 돈 후안 자신의 기함을 비롯하여 교황, 사보이, 베니스 및 제노아의 기함이 배치되었다. 그 우측에는 제노아의 도리아(Gianandrea Doria) 지휘 아래 53척의 강력한 갤리선으로 구성된 녹색전대가 전개되었다. 좌익에는 바르바리고(Agostino Barbarigo)가 지휘하는 황색전대가 전개되었는데, 이 전대는 갤리선 55척으로 구성되었다. 각 전대의 갤리선은 간신히 노를 저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밀집된 진형을 유지하였다. 또한 두오도(Francesco Duodo) 지휘 아래 6척의 갈레아스 선이 2척씩 3개 전대의 전위를 형성하였다. 10척의 갤리선이 중앙전대의 기함 5척을 지원하기 위해 후미에 배치되었다. 다시 1마일 후방에 스페인의 산타크루즈(Marquis of Santa Cruz) 지휘 아래 30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된 백색전대가 후위전대를 형성하였다.
  터키함대도 역시 3개 전대와 1개 예비대로 편성되었다. 사령관인 알리 파샤가 지휘한 중앙전대에는 94척의 갤리선이 배치되었다. 시로코(Mahomet Srocco)가 지휘한 우익전대는 60척의 갤리선으로 구성되었다. 좌익전대는 알제리아의 왕 울루치 알리(Uluch Ali)의 지휘 아래 65척의 갤리선이 배치되었다. 알리 파샤 전대의 후방에 배치된 예비대는 드라구트(Amurat Dragut)의 지휘 아래 10척의 갤리선과 60척의 소형 함선으로 구성되었다.
  10월 7일 오전에 전투 준비를 갖춘 양측 함대는 북쪽으로부터 남쪽으로 진형을 갖추었는데, 기독교함대는 서쪽, 터키함대는 동쪽에 위치하여 대치하였다. 기독교 함대는 적이 포위하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좌익을 연안 가까이에 배치해 두었다. 처음에는 터키함대에 유리한 남동풍이 불었다. 수적으로 우세하여 승리를 확신한 알리 파샤는 기독교 함대의 중앙을 공격하기로 결심했으며, 동시에 시로코 전대의 일부를 이용하여 기독교 중안전대의 좌익을 포위하려고 하였다. 터키함대의 갤리선들은 모두 돛을 이용하여 기독교함대를 향해 전진하였다. 기독교측 함선들도 노를 저어 서서히 접근하였다.
  갑자기 남동풍이 멈추자 돛으로 더 이상 바람을 이용할 수 없게 된 터키 함선들은 속력이 느려졌고 방향을 잃어 정지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정오가 가까워 오자 기독교함대에 유리한 서풍이 불기 시작하였다. 마지막으로 전열을 확인한 돈 후안은 병사들을 격려하고 전투태세를 갖추도록 명령했다.
  기독교함대에서는 중앙에 위치한 청색전대가 완벽하게 전개를 완료하였고 좌측의 황색전대도 전개를 완료하였다. 그러나 우측에 위치한 녹색전대의 갤리선들이 다른 전대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기동하였는데, 이는 마치 도리아가 현장을 탈출하려고 기도한 것처럼 보였다.
  본격적인 전투는 정오경부터 시작되었다. 그때 알리 파샤가 원거리에서 돈 후안의 기함을 향해 포격을 개시하면서 접근하였다. 돈 후안도 즉시 응전하여 적함을 향해 그의 선수포를 발사하였다. 이때 대치하고 있던 각 전대는 서로 상대를 향해 접근하였다. 이제 돛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된 터키 함선들이 빠르게 노를 저어 접근하였는데, 터키 함선들은 앞에 가로막고 있는 두우도의 거대하고 강력한 갈레아스 선을 보고 진형을 변경하여 갈레아스 선과 멀리 떨어지려고 노력하였다. 그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갈레아스 선으로부터 가공할 포격을 받아 손상을 입기 시작하였으며, 곧 기독교측 갤리선과 충돌하였다. 이제 더 이상 전술적 기동이 소용없게 되었으며, 해상전투는 지상전투를 방불케 하는 혼전 양상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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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판토 해전 당시 유럽

 

  전투는 갤리선 건현판(gunwale)의 선수 발사대 그리고 통로를 따라 발사되는 화살, 화승총, 칼 등의 무기가 난무하는 가운데 전개되었다. 매우 치열한 백병전이 기함 사이에 전개되었다. 알리 파샤의 기함은 돈 후안의 기함과 접전하였으며, 기독교함대와 터키함대의 여러 갤리선이 그들의 기함을 지원하기 위해 사력을 다하였다. 격렬한 전투가 끝난 후 알리 파샤의 기함이 나포되고 이슬람교의 녹색기를 끌어내린 그 자리에 십자기가 게양되었다. 터키함대는 알리 파샤가 전사하자 함대의 사기가 크게 떨어졌다.
  중앙전대의 전투가 진행되는 동안에 베니스의 바르바리고가 지휘하는 황색전대는 터키함대의 우익전대와 격렬한 전투를 전개하였다. 시로코 전대가 자신을 포위하려고 시도한다는 것을 간파한 바르바리고는 오히려 예하 갤리선을 인솔하여 적진을 향해 돌진하였다. 바르바리고의 공격이 너무나 격렬하였기 때문에 터키 함선들은 육지 쪽으로 도주하였다. 시로코는 혼전에 가담하지 않았던 38척의 갤리선과 함께 바르바리고의 기함을 나포하려고 시도하였으나 두 번 다 격퇴당하고 말았다. 제3차 공격 때 화살이 바르바리고의 눈에 명중하였다. 지휘관의 치명상으로 인해 기함의 병사들이 구심점을 잃었으나, 다른 베니스 동료 갤리선들이 전력을 기울여 마침내 시로코의 갤리선들을 굴복시켰다.
  우익을 제외하고는 모든 전황이 기독교함대에 유리하게 진행되었다. 우익인 도리아 전대는 이상한 기동을 전개한 결과 전투 대열에서 멀리 이탈해 있었으며, 이 공간으로 인해 울루치 알리가 기독교 중앙전대를 협공할 수 있게 되었는데, 후위전대의 산타 크루즈가 개입하여 중앙전대는 위기를 모면하게 되었다. 그러나 우익전대에서도 기독교 함대의 용맹성이 유감없이 발휘되었는데, 몰타의 기함을 포함한 이탈리아의 갤리선 17척이 위치를 고수하라는 도리아의 명령에 불복하고 울루치 알리 전대의 퇴각을 차단하려고 시도하였다. 우익전대의 전투에서 기독교측은 1천명의 인원과 12척의 갤리선을 잃었으나 25척의 터키 갤리선들에 심한 손상을 주고 이들을 나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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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판토 해전도

 

  저녁까지 계속된 이 해전은 기독교 함대의 완승으로 끝났다. 알리 파샤의 갤리선 229척 가운데 8척이 소실 또는 침몰하였으며 117척이 나포되었다. 또한, 60척의 소형 함선 가운데 27척이 침몰하였고 13척이 나포되었다. 울루치 알리를 제외하고 알리 파샤를 비롯한 모든 터키 지휘관들이 병사와 선원 약 40,000명과 함께 전사하였으며 8,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그리고 터키 함선에서 노수로서 쇠사슬에 묶여 있던 약 10,000명의 기독교인 포로가 자유를 찾게 되었다. 한편, 기독교함대는 용맹한 지휘관인 바르바리고를 포함하여 7,656명이 전사하고 7,784명이 부상을 당했다.


Ⅳ. 해전의 결과와 교훈 : Consequences

  레판토 해전은 터키 세력의 지중해 진출을 좌절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해전은 곧 기독교연맹이 와해됨으로써 제해권을 확장하거나 이용하지 못했기 때문에 장기적 측면으로는 전략적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참가한 세력의 규모에 있어서도 매우 인상적이었던 레판토 해전은 함포가 사용되었지만 본격적인 기동전투라기보다는 충각전투였으며 백병전 형태로 전개되었다. 구조가 가볍고 노에 의해서 추진되던 노선은 포의 발달과 더불어 이제 보다 대형이며 무거운 강력한 범선으로 대치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레판토 해전은 노선시대의 마지막 해전을 의미하였다.
  레판토 해전에서 기독교함대의 승리 요인을 살펴보면, 첫째, 함선의 성능이 우세하였다. 기독교측은 6척의 강력한 갈레아스 선을 보유하였고 함포의 수 면에서 우세하였다. 둘째, 함대사령관 돈 후안의 지휘 역량이 뛰어났다. 그는 당시 24세의 청년에 불과하였지만 기독교 연맹이라는 이질 집단의 질투, 과잉 경쟁 그리고 배반을 방지하기 위해 각국의 함선을 분산·배치하고 끈기 있는 지휘 역량을 발휘하였다. 셋째, 전투요원의 전투 자질이 뛰어났다. 기독교 함대의 병사와 선원들은 종교적 신념과 기사도 정신으로 전력을 다해 싸웠으며 특히 스페인 보병의 전투자질이 우수하였다.
  한편, 터키함대의 승조원들도 최선을 다해 싸웠지만 함선의 성능과 포에서 열세하였다. 특히, 터키함대는 근거리에서 갈레아스 선으로부터 포격을 받아 전투 초기부터 많은 손상을 받았으며 바람의 영향도 유리한 위치에 있었지만 기선을 제압당했던 것이다.
  레판토 해전이 주는 교훈을 두 가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질서정연한 전투 진형의 유지는 승패의 중요한 요인이 될 수 있다. 기독교 함대의 갤리선들은 처음부터 밀집된 진형을 유지하고 각 함선이 협력할 수 있도록 하였다. 반면에 터키함대의 함선들은 바람과 갈레아스 선으로 인해 진형이 다소 산만해진 상태에서 전투를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기독교함대는 백병전에서 전반적으로 유리한 전투를 수행할 수 있었다. 한편, 멀리 이탈한 우익전대 때문에 기독교 함대의 중앙전대가 위험에 노출되었는데, 다행히 후위전대의 적절한 행동으로 위기를 모면하였다. 만약 이 해전에서 기독교 함대가 패전했다면 멀리 이탈한 우익전대의 행동이 패전의 주요 요인이 될 수 있었다.
  둘째, 근접전투에서 적의 기함에 대한 공격은 승패의 분수령이 될 수 있다. 이 해전에서 양측은 서로 상대방의 기함을 나포하기 위해 맹렬히 공격을 가했는데, 이는 전체 함대의 사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기독교함대가 승리했다고 볼 수 있다. 적의 기함에 대한 공격은 노선시대와 범선시대의 근접전투에서 흔히 나타나는 양상이었지만, 현대 해전에서도 적의 기함에 대한 공격은 적의 지휘기능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점에서 역시 중요하다. 따라서 기함의 생존성을 위한 대책의 강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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