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2호(12-1월) | 학도병, 문산호 그리고 장사상륙작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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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ritten by 이원희 작성일20-02-12 11:32 조회632회 댓글0건본문
인천상륙작전에는 유엔군과 해군 군함 수백 척이 동원되었지만 장사상륙작전은 민간선박 문산호 한 척이 맡았다. 문산호는 2차대전이 끝난 1947년 한국 정부가 미군에게서 사들인 수송선 여덟 척 중 하나다. 교통부 산하 해운공사 소속으로 묵호항(現 동해시)에서 석탄을 싣다가 전쟁이 발생하자 해군에 차출되었다. 6‧25 이튿날 석탄 대신 퇴각하는 국군을 태우고 묵호항을 출발해 부산에 갔다. 이후 여수로 이동해 거기서도 후퇴하는 국군을 부산으로 실어 날랐다.
한반도에서 부산만 빼고 전부 북한군들에게 점령당한 1950년 9월, 민간 선박 문산호는 학도병 772명과 해군 56명 등 828명을 태우고 경북 영덕군 장사 해안에 닿았다. 인천상륙작전에 맞춰 적을 교란하고 보급로를 끊기 위해서였다. 139명이 전사했으며, 그중에는 문산호 선장과 선원 11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군번없이 참전해 군인 못지않게 싸웠지만 전쟁이 끝나자 그대로 잊혀졌다. 6‧25전쟁 참전용사인 최영섭 예비역 대령이 2012년 전사자 130여 명 명단에 군인 이름만 있고 선원들 이름은 없으니 찾아야겠다고 마음먹고 이 사람들 기록을 찾아 훈장을 타게 해주는 걸 자기의 ‘버킷 리스트’로 삼았다. 이후 임성채 해군 군사편찬과장과 함께 7년간 문서고를 뒤져 전사자 이름이 적힌 옛 서류를 찾아냈다(조선일보, 2019.7.6). 1950년 9월 국군과 함께 싸우다 침몰한 민간 선박 문산호 선원 10명이 전사한지 69년 만에 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함께 전사한 선장 故 황재중씨에게는 2018년에 한발 먼저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했다.
4.교훈 및 시사점
계급도, 군번도, 군복도 없이 ‘펜 대신 총’을 들고 참전하였던 학도의용군(학도병)들의 활약은 우리들에게 많은 교훈과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첫째, 학도의용군들이 자발적으로 출정하여 구국전선에서 보여 준 애국애족정신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귀감이 된다. 일본 식민지배를 벗어난 지 5년 만에 공산군의 침략을 받은 조국, 불타는 학교, 폐허가 된 마을, 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을 보며 투지가 불탄 학도병들은 비록 총이 다르고 교복이 서로 달랐지만 머리에 두른 흰 띠로 일체감을 표시하였다.
둘째, 학도의용군들은 전쟁 초기 부족했던 병력수급의 물꼬를 튼 촉매제 역할을 하였고, 각종 전투에서 혁혁한 성과를 이루었다. 1951년 2월 28일 복교령이 내려졌지만 상당수가 장교로 현지임관하여 국방에 기여하였다. 이들의 활약상은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정신으로 재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셋째, 군번도 계급도 없이 참전하여 적과 싸우다 장렬히 산화한 학도의용군들의 구국정신은 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특히 재일학도의용군의 참전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의미심장하다. 세계 언론은 1967년 제3차 중동전쟁(6일 전쟁) 당시 미국에 살던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위해 참전한 사실을 두고‘세계 최초의 재외국민 참전’이라고 찬사를 보냈지만 1950년 6‧25전쟁에 참전한 재일학도의용군이 유대인보다 먼저 참전하였다(육군본부, 2012). 재일학도의용군의 6‧25참전은 이들보다 무려 17년이나 앞선 일이다.
넷째, 학도의용군들의 희생정신을 기억해야 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경제대국, 문화대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학도의용군처럼 조국을 위해 희생한 수많은 영웅들이 있었기에 가능하였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섯 째, 포항 여중 전투는 20만여 명의 피난민을 무사히 피난케하고 북한군의 진격을 두 시간이나 지연시켰으며, 영덕 방면에서 고립상태에 빠진 3사단 주력부대를 철수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었다. 장사상륙작전은 인천상륙작전에 기여하였고 맥아더 장군도 편지로 그 공로를 격찬한 바 있다.
5. 결론
난세는 영웅을 만든다고 했다. 6‧25전쟁은 대한민국의 존망을 좌우하는 최대의 위기였지만 이름도 없이 사라져 간 수많은 영웅들 덕분에 이를 극복할 수 있었다. 학도의용군의 정신은 신라의 화랑도 정신과 조선시대 유생들의 의병정신에서 유래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맥아더 장군은 분명 인천상륙작전의 주연이었지만 그 뒤에는 장사상륙작전에서 빛나는 조연 역할을 한, 군번도 계급도 없이 오직 호국의 일념으로 몸을 던진 어린 학도의용군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6‧25전쟁이 발발한지 7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남북분단과 정전은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6‧25전쟁의 상흔은 점점 우리들의 기억 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다. Freedom is not free, 자유는 거저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포항여자중학교 전투에서 전사한 학도의용군 이우근 학생이 어머니께 보내는 편지의 일부를 소개하며 이로써 결론을 대신하고자 한다.
<어느 학도병의 편지>
어머니! 저는 사람을 죽였습니다. 그것도 돌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10여 명은 될 것입니다. 나는 4명의 특공대원과 함께 수류탄이라는 무서운 폭발 무기를 던져 일순간에 죽이고 말았습니다. 수류탄의 폭음은 나의 고막을 찢었습니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귓속에는 굉음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 중략 -
어머니! 어쩌면 오늘 제가 죽을 지도 모릅니다. 저 많은 적들이 그냥 물러날 것 같지는 않습니다. 어머니, 죽음이 무서운 게 아니라, 어머님과 형제들을 못 만난다고 생각하니 무서워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살아가겠습니다. 꼭 살아서 어머님께 가겠습니다. 어머니, 이제 겨우 마음이 안정되는군요.
어머니! 저는 꼭 살아서 어머니 곁으로 가겠습니다. 상추쌈이 먹고 싶습니다. 찬 옹달샘에서 이가 시리도록 차가운 냉수를 들이키고 싶습니다. 아! 놈들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또 다시 쓰겠습니다. 어머니 안녕! 안녕!
아, 안녕은 아닙니다. 다시 쓸 테니까요. 그럼
1950년 8월 11일 아들 이우근 올림
참고문헌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전사 제3호』, 서울 : 신오성기획사,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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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계호,『총력전의 이론과 실제』, 북코리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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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규석, “학도의용군의 활동유형 분석”,『한국전쟁사의 새로운 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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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대학,『한국전쟁사(上)』, 2004.
육군본부,『6‧25전쟁 다하지 못한 이야기들』, 2012.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1129일간의 전쟁 6‧25』,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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